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보려면 고통스럽다. TV 화면에 가득 사자나 악어가 클로즈업되고 목을 물려 바둥대는 초식동물들의 경련이 넘쳐난다. 포식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의 피와 살점을 먹고 산다. 생사가 무상한 사파리를 24시간 방영한다.

어린 양이나 야생동물들의 고통이 화면에 넘쳐나는데 그런 장면들을 통쾌하게 보는 시청자

김진웅 김&장 법률사무소 전문위원
김진웅 김&장 법률사무소 전문위원

들이 많다는 것은 새삼 놀랍다. 약자 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대신 맹수의 사냥본능을 쉽게 즐기는 거다. 스페인에서는 투우를 보기 위해 매머드 경기장이 만석을 이룬다. 인간은 잔인성을 내재한 것이 틀림없다.

유명한 대학교의 교정에 가면 독수리상이나 호랑이 동상이 캠퍼스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포식자(predator)들이다. 학생들이 닮으라고 권장하는 학교의 상징물이다. 전국의 중고등학교도 사정은 비슷하다. 맹수나 맹금류를 학교의 상징물로 세우고 교기나 모자에 새겨 넣는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맹수의 강한 모습을 학생들에게 본받으라는 뜻인 모양이다.
반면에 조화와 협업의 표상인 벌이나 개미, 평화를 연상시키는 비둘기나 선량한 양, 또는 아름다운 백조를 학교 휘장이나 동상으로 세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살생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된 이들은 맹수와 맹금을 아이들에게 본받으라는 게 뭐가 이상하냐고 할지 모르겠다.

주지하듯이 학교는 인성을 함양하는 교육의 요람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어린 학생들에게 포식자들을 자기 학교의 표징으로 삼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재고할 만큼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이길 희망한다.

현대는 공존과 소통 그리고 평화를 지향하는 문명시대이다. 인류는 중세의 암흑시대나 제국주의 시대의 무력과 식민통치를 넘어서서 현대에 진입한 거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포악한 맹수나 맹조를 학교 상징물로 어린 세대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 교육현장의 둔감성을 보여주는 단면일 수 있다. 북한이 유치원 아기들에게 미군 타깃을 향해 총을 쏘라는 교육을 시키는 것만큼 생경할 수 있다.

부끄럽지만 젊은 국가대표들을 구타하며 훈련시키는 코치나 감독이 아직도 있고, 땅콩 때문에 폭언을 하고 비행기를 회항시키는 젊은 여성이 있는 우리나라는 맹수를 학교 표상으로 삼는 학교 분위기와 전혀 무관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유럽의 많은 교육기관에서는 학생들을 성적으로 순위를 매기거나 공개하는 법이 없다고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협력과 공존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경쟁과 승패로 인생을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교육을 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어떠한가. 유아반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초등학생에게 중학교 수학을 선행 학습시킨다. 이런 한국 학무모가 유럽에서 선행학습 이야기를 했다가 현지 교사에게 제지 당하는 소식들은 별로 새롭지도 않다. 유럽의 교사들은 선행학습 이야기에 펄쩍 뛴다. 전인적 교육 대신 공부 기계를 만드는 게 교육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학생들은 아예 학교 라커에 교과서를 넣어두고 집에 온다.

지금도 그러한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우열반으로 나누어 가르치던 시절이 있었다. 열반이었던 학생들은 세월이 지나 백발이 성성해도 동창회에 나오면 학창시절 이야기를 할랴치면 부끄러웠던 그 기억을 말한다. ‘우린 그 때 돌반(열반)이었지’라고 자조하며 성적지상주의 교육자들 때문에 되살리고 싶지 않은 학창시절이 되고만다.

때로는 반 평균이 나쁜 경우 담임이 그 반 학생 전원에게 매질을 하기도 했다. 성적이 무엇이기에 인성을 도야한다는 학교에서 그리 하였을까 싶다. 그 것은 일부 교육자들이 학생보다는 자신들의 교육 성취 평가를 위하여 비인도적인 방법들을 동원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예전에 못살고 어려울 때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고들 한다. 그러나 경제력이 커질수록 우리 사회는 냉혹하고 비정해진다고 말한다. 어린 아이들이 울고 들어오면 너도 때리고 오라고 젊은 엄마들은 부추기고, 국회에서는 몸싸움과 고성이 난무하고, 친교할 이웃나라 사람들은 모두 떼놈 아니면 왜놈이며, ‘때려잡자 공산당’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맹수와 사바나를 연상하게 한다.

많은 대학들은 한류 붐을 타며 한국어학당을 개설하고 외국 학생들을 받고 있다. 유럽, 일본, 동남아, 아프리카 등 다양하다. 이들은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 문화 접촉의 기회를 갖는다. 이들의 survey 반응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주한 외국인들은 모국과 한국을 비교하며 한국사회의 특이성을 체험하게 된다. 당연히 긍정적인 점도 보이고 부정적인 점도 보인다. 그들 눈에 보이는 우리는 개인적인 교분에서는 정이 많다고 인정한다. 반대로 공적인 관계에서는 시민정신이나 공정함이 정만큼 많은 것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귀중한 사회안전망은 그 구성원들의 신뢰체계에 있는데 시민정신이 부족하고 공정함이 부족하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살아서 인생의 향기를 놓치며 산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보다는 스페인이나 동남아 같은 느긋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도 한다. 사실 에디슨이 빨리 빨리로 살아서 온 세상을 밝히는 전구를 만들어냈는가? 마이크로소프트 회사를 만든 빌 게이츠가 대입 수능을 잘 봐서 온 세상 PC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피카소가 미적분을 잘 풀어서 미술계의 거장이 되었는가?

이젠 전과목을 모두 완벽하게 잘 해야 하는 철인 경기를 그만 시켜야 한다. 어느 과목이든 한, 두 과목을 잘 하면 스스로 흥미 있는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 성장하도록 장려하는 방향으로 교육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창의성과 흥미는 제켜 놓고 기계적으로 암기해 좋은 대학에 가고,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매는 한 우리는 노벨상도, 피카소도 배출할 수 없는 불임 사회가 될 뿐이다. 창의적이고 희망이 있는 미래를 위하여서는 교육체계를 확 바꾸어야 한다. 수학 공식 하나, 영어 단어 하나를 더 외워서 우리 사회가 획기적으로 좋아지지 않는다.

성적 지상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각자의 창발적 성장을 지원하고, 말로만 외친 인성교육을 제대로 시작해야 향기있는 인간을 만들어 내서 살맛 나는 나라가 된다. 이제 보통 시민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인성을 쌓도록 모쪼록 실사구시적인 교육에 매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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