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위안 그리고 도전과 희망

한 해가 저무는 12월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고단한 만큼 시간이 더 빨랐는지 모르겠다. 오는 3일은 제 26회를 맞는 세계장애인의 날이다. 이를 기념해 지난달 22일 여의도 KBS홀에서는 전국장애인합창대회가 열렸다. 합창 콘서트나 경연은 많이 열리지만 장애인 경연은 유일하다. 이들의 경연을 보면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장애를 훌쭉 뛰어 넘어 도전과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감동이었다. 각 장애인들이 서로 장애에 입장을 이해하고 협력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가는 것은 스스로의 치유는 물론 보는 이들에게 강한 메시지가 전달된다.

예전에 비해 장애인의 대우나 사회의 시선이 달라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한계가 많은 것 닽다. 음악의 경우만 해도 장애인합창단은 많지만 시립합창단처럼 직업화가 된 곳은 없다. 이들 역시 장애와 상관없이 오히려 더 높은 기량을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도 말이다.

우선은 이들의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이들의 기량을 더 높은 곳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정책이 부재한 것이 원인이겠다.

장애인 국립합창단 혹은 시립합창단은 어떤가?

필자는 지난해 합창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최초의 맹인합창단인라파엘 코러스를 보면서 기존 합창단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사운드 칼라와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들을 국립이나 시립으로 승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국에 60여개에 이르는 시립합창단이 있지만 장애인 예술가들을 직업으로 고용한 경우는 없다. 이것은 장애인 예술에 대한 치별이거나 무관심이다. 이들의 연주력이나 전문성이 언급되지 않아 제도화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만시지탄 지급부터라도 논의를 시작하면 어떨까 한다. 이들이 직업화로 상향된다면 장애인복지가 한 차원 높게 발전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예술 활동을 지금껏 지원하고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은 참으로 땀 흘림의 수고가 아닐 수 없다. 전체 장애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도 모범적인 활동에 혜택을 부여했으면 한다. 이것은 개인이 쉽게 할 수 없기에 정부가 나서는 것이 당연한 책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애인 예술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있어야겠다. 그렇지 않고 이들에 대한 관심이 동정심 수준이라면 장애인 문화는 한계에 머물고 말 것이다. 솔직히 일반 시민이나 행정가들이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의 권익을 드러내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우리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로 가려면 국민으로서의 누릴 권리에서도 차별이 없어야 한다. 평등은 기회의 균등이란 날개로 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같은 일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기에 지속적인 여론의 환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말보다 실행을 위한 절차가 무엇일까? 연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해서 우리 사회의 성숙도에 걸맞는 지원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많은 장애인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에 관심이 필요하다. 세계 장애인의 날이 그냥 하루만의 축제이거나 반짝 관심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합창단의 경우 장애와 정상인을 가르지 않는 합동공연도 늘어났으면 한다. 아울러 이들을 위한 전용 콘서트홀 건립이 필요하다. 현행 공연장에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은 난관이 많아서 관람의 즐거움 보다 피로가 더 클지 모른다. 때문에 사실상의 선택권이 제한되어 있다. 시각장애인이나 기타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도 많아 특수 공간이 필요하다.

기념식만 남는 장애인의 날이 아니어야

지금 당장은 경제가 어렵다지만 그래도 OECD 가입한 나라로서 어깨를 겨눌 만큼의 장애인 복지 정책이 뒤 따라야 할 것이다. 부언하지만 그저 장애인의 날 축사하고, 꽃다발 하나 주는 것의 장애인의 날이어서는 안된다. 진정성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눈물을 씻어주고 자긍심이 살아 날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사회에 약자에 대한 갑질(甲質)이 늘고 있는 것 역시 배려의 문화가 결핍되어서다. 콩 하나도 나눠 먹던 미덕의 사회가 오늘에 살벌해진 원인이 무엇일까. 그 시스템을 고치려는 다짐을 장애인의 날에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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