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을 생각해보면 만화 때문에 몸살이 났었던 기억과 몰래 빼낸 달걀 한 개를 손에 쥐는 날에는 만화 가게로 뛴 것이 생각난다. 그곳에 가면 단돈 10원으로 상중하 세 권의 만화를 볼 수 있었다.

달걀이 귀했던 시절 달걀만 갖다 주면 만화책을 신간은 3, 조금 오래된 만화는 6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학교가 끝나자마자 닭장 앞에 쪼그려 앉아서 닭이 울기를 기다렸다. 어느 순간 닭의 항문이 열리고 따뜻한 달걀 한 개가 툭 떨어지면 두 손에 움켜지고 만화 가게로 뛰었다, 그렇게 내가 한글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만화는 나의 작은 인생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때 이미 내 길이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허구헌 날 엄마의 그악 스럽던 호통에 밀려서 부랴부랴 했던 숙제도 세월이 흘러 텔레비전이 만화가게를 점령했을 때야 비로소 종이 만화책이 생명이 되어

서 흑백 화면으로 내 눈앞에 펼쳐졌을 때 나는 환희와 격정으로 텔레비전 앞을 떠나질 못했다.

엄마의 극악은 이제 텔레비전과의 전쟁이 되었다. 회초리에 종아리가 남아나지 않아도 나는 그 신비한 화면 앞에서 떠나질 못했다. 흑백 텔레비전 안에서 움직이는 뽀빠이와 동양방송의 황금박쥐는 모든 어린이들의 주제곡이 되었다.

어디~어디~에서 날아왔니 황금박쥐! 뽀빠이와 올리브의 모험심 강한 로맨스 우리의 고전 홍길동 그리고 아라치 마루치 등등... 내가 텔레비전으로 만화를 보고 난 뒤로는 우리동네 담벼락은 온갖 만화의 주인공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미 그때 벽화가 시작되었다는 나의 우쭐됨이 지금 생각해도 웃음만 나올 뿐이다, 세월이 흘러 나는 우연찮은 계기로 애니메이션 회사에 입사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88올림픽이 지나자 우리나라는 애니메이션 하청업이 활발했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의 하청인력은 꼼꼼하고 성실함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국내 제작사들이 경제적 논리로 창작애니메이션의 자체제작을 꺼렸고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에 맞물리다 충분한 실력과 기획력이 있음에도 우리는 기술의 축적이라는 미명아래 창작의욕을 접는 불운을 맞이하게 됐다.

내가 어려서 봤던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수식어를 달아도 손색없는 한국최초의 총천연색 장편 애니메이션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이 탄생했다. 당시 국내제작비용 5천만원의 제작비용은 국내영화 제작비의 10배 규모였다. 또한 홍길동은 선 녹음 후 작화 방식의 풀 애니메이션기법을 구현해 기술적 완성도를 높였다.

당시 홍길동이 개봉하여 약 3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귀염을 토하기까지 했다. 같은 해 흥부와 놀부는 최초의 스톰모션 기법으로 제작된 오브 젯 애니메이션이기도하다 애니메이션이 아동문화로 정착되면서 1982년 프로야구 출범으로 인해 스포츠을 소재로한 애니메이션이 다수 제작됐다.

만화가 이상무 선생님의 독고 탁 시리즈 1986년 허영만 인기만화, 이학빈 감독의 각시탈 등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지만 홍길동 이후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은 홍길동의 성공을 재현하지 못하고 한동안 제작이 중단되었다가 하청으로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TV용 애니메이션의 자체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 첫 작품으로 떠돌이까치’ 198755KBS에서 어린이날 특집으로 방영되었다.

홍길동 이후 20년 세월이 지나서야 TV용 애니메이션이 탄생되었다. 이후 달려라하니13편의 시리즈물로 기획 제작되었다. 만화가 이진주의 원작으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주인공 하니가 꿋꿋하게 육상선수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스포츠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자리를 잡았다.

달려라 하니를 중심으로 동화나라 ABC. 아가공룡둘리, 머털도사,영심이,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경쟁적으로 제작 방영되었다. 시나리오 창작의 부담을 덜고 원작의 인지도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애니메이션을 안방극장의 대중화 하기에 전력을 다해왔다.

1990년 이후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2D 제작방식을 벗어나 디지털 시대를 맞이했다. 1995년 문화산업으로서 애니메이션은 영상산업진흥기본법을 제정하고 향후 10년간 애니메이션 부분에 100억원을 지원한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대학에 애니메이션 학과가 만들어졌고, 만화 전문 채널 투니버스가 개국했고,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면에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부활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1990년 이후 극장용 성인애니메이션 블루시걸, 난중일기,  전사 라이안, 철인사천왕 등이 산만한 스토리와 자체기획력 제작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참패했다.

2000년대의 창작애니메이션의 약진은 2D3D를 같이 사용해 입체적 공간감을 살리고 한국적 서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오세암과 마리이야기는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이후 지금도 많은 아동용 애니메이션들이 성공을 거두며 한국은 애니메이션의 강국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우리 애니메이션은 창작 스토리를 통해 차별화된 우리만의 정서적 스토리텔링이 무엇보다 필요하며 마케팅 노하우도 필요하다. 독립제작방식의 작품들로 높은 완성도를 이루고 지금 이 순간에도 꿈과 미래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학교안의 애니메이터를 꿈꾸는 여러분들께 말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영화와 다르게 유독 애니메이션에 우리 고유문화 스토리를 입히기 쉽지 않다. 필자도 제작에 참여했던 전사 라이안은 그때 내가 봐도 국적 정체성이 모호했다.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고, 뒤이어 혹평과 함께 극장에 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크린에서 내려오는 참패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패가 주는 또 다른 시작도 있었음을 말하고 싶다. 스스로 피드백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이 창작자들이 진심으로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저작권자 © 원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